■회생 / 백온유 / 작품분석 / 2024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중에서
1. 전체적인 소감
주인공의 감정을 이렇게 섬세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특히 현장묘사는 TV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해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작가가 누구였지? 맨 앞장으로 돌아가 작가의 사진과 약력을 다시 살펴봤다. 처음인데도 그만큼 백온유의 글은 인상적이었다.
단편 소설에서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많다. 그중의 하나는 ‘캐릭터 구축’이다. 그래야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동기가 생기고 독자는 그걸 이해한다. 이게 없다면 스프를 넣지 않은 라면처럼 얼마나 밋밋하겠는가. 어떤 작가는 이걸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그런 소설은 지루하고 재미도 없다. 작가는 밀가루 반죽을 할때 물을 넣고, 설탕을 넣고, 소금도 넣고,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을 넣어야한다. 이게 캐릭터 구축이다. 이후 숙성과정에서 독자는 상상한다. 이게 미적거리다. 나는 이런 글이 잘 쓴 작품이라고 믿는다. 캐릭터 구축과 독자의 상상이 빚어내는 소설.
"수영아, 나중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얘기해." 이건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설 속에서 수영은 한결같다.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손에 든채 수영은 연지와 계속 같이 지낸다.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소설 속 상황이 마치 내 얘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도 예전에 수영처럼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영처럼 타이밍을 놓쳐서 말을 못 한 적이 있었다.
2. 서사
(1) (현재) 어젯밤에 수영은 연지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오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먼저 도착한 수영은 연지에게 도착 문자를 보내려다 재촉하는 느낌이 들까 봐 그만두었다. 연지를 위한 선물로 수영은 고가 브랜드인 접시 세트를 3개월 할부로 준비했다. 이른 시간의 카페는 물걸레로 바닥을 닦은 지 얼마 안 되었고 바닥에 놓아둔 쇼핑백은 아래가 약간 젖어 있었다. 어차피 겹겹이 포장되어 있으니 상관없었다. 연지가 집들이에 초대하면 가져가려고 사둔 선물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연지의 아이 준희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서 경황이 없어 그랬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20분이 더 지나서 연지에게 메시지가 왔다. 준희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느라고 늦는다고. 수영은 천천히 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2) (과거) 수영과 연지는 같은 대학에 다녔지만 친하지는 않았다. 연지를 다시 만난 것은 수영이 졸업하고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뒤였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수영은 보증금의 절반을 아버지에게 보낸 후에 집세가 싼 곳으로 이사 왔다. 그 후 수영은 보증금을 까먹으며 공부와 일을 멀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사 온 동네에서 수영은 나눔방 카페에 가입한 후 매일 카페에 상주하며 나눔을 받았다. 그중 유독 나눔의 질이 좋은 이용자가 있었는데 닉네임 ‘요술램프’의 게시글에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요술램프가 사는 더퍼스트 로얄팰리스 파크뷰1차는 근방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였는데 수영은 그곳에 나눔을 받으러 갈 때마다 위축되었다. 여섯 번이나 요술램프에게 나눔을 받는 동안에도 수영은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날 요술램프가 올린 곡물 효소 60포를 보고 수영이 가장 먼저 댓글을 달았지만 ‘재광초총동문회장’이 30포씩 나누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날따라 양보하기 싫었던 수영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거짓말과 함께 양보하지 않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후 카페의 다른 사람들이 수영을 지목하며 <나눔방 거지 구걸 목록>들을 일자별로 정리해 게시판에 올렸다. 효소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나눔 글은 지워졌다. 몇 분 뒤 ‘요술램프’가 마음이 편치 않다며 임신 축하 인사와 함께 수영에게도 60포 한 상자를 주고 싶다는 쪽지가 왔다. 수영은 다음 날 더퍼스트 로얄팰리스 파크뷰1차로 갔다. 그곳에서 수영은 연지를 만났다. 요술램프는 대학 동창인 연지였다. 연지는 반갑다는 말과 함께 임신 축하의 의미로 영양제와 바디 크림, 루이보스 티를 담아줬다. 수영은 임신했다는 거짓말이 뜨끔했으나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수영과 얘길 나누던 연지는 남편이 없고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다고 말했다.
(3) 이후 수영은 연지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응했다. 연지는 일주일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식료품을 주었는데 그때마다 수영은 울컥했으나 표현하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유산을 미리 상속받은 연지는 심각한 쇼핑 중독이었는데 그래서 항상 택배 상자가 가득했다. 베란다 한구석에 화분을 놓고 수세미 씨앗을 파종한 후 두 사람은 장난을 치며 놀았다. 수영은 익숙하게 냉동실에서 얼린 밥을 꺼내고 곰탕을 조리했다. 단 몇 주 만에 연지의 주방까지 들어와 요리하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이 수영은 믿기지 않았다.
(4) 임신 5개월 차에도 배가 나오지 않는 수영에게 연지는 이상하다고 말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수영은 불안함과 후회가 가슴을 짓눌렀으나 수영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월세가 밀렸고 보증금이 바닥났다. 아예 여기에 들어오라는 연지의 제안을 듣고 수영은 짐을 싼 캐리어를 끌고 8차선 도로를 지나며 생각했다. 자신이 어딘가 조금 뻔뻔하고 모질어졌다는 느낌이었다. 같이 살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 훼방을 놓지 않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연지는 택배 상자가 가득한 방을 치우고 아기방으로 꾸미자고 제안했다. 수영은 잘못을 고백할 기회가 지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영은 연지의 독특한 버릇을 발견하는데 나눔을 받으러 온 사람이 문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부터 물건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눔을 받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연지는 아기 물건을 택배로 주문한 뒤 뭐든 빨리빨리 쓰고 싶다고 주어진 걸 다 소진하면 이 지루함도 달라지지 않겠냐고 수영에게 속내를 얘기했다. 수영이 거실에서 공무원 시험 문제집을 볼 때 소파에 묻은 생리혈을 보면서 연지가 119를 부르자고 말했다. 연지는 당황하지 말라고 너도 아기도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수영은 연지의 전화기를 뺏으며 생리혈이라고 고백했다. 연지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냐고 물었다. 수영을 말을 듣고 연지는 가능하면 이번 주 내로 나가 달라고 말했다.
(5) 2년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 수영은 여덟 번을 낙방한 뒤 시험을 포기했다. 대신 독서지도자 자격증을 따 방과 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역 문화 센터와 도서관에서도 일했다. 그러는 사이 수영은 연지를 종종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며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 달랐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수영은 연지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현재) 약속시간 사십 분이 지난 후 연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사를 나눈 후 수영은 대안학교 교사로 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연지는 준희가 언어 구사 능력이 좋다는 것과 남편이 승진했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린이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연지는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일어섰다. 수영은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건네며 별거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카페 유리창을 통해 멀어지는 연지를 보던 수영은 자신이 준 쇼핑백에서 선물 상자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쇼핑백의 젖은 바닥이 찢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영의 귀에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때 수영은 자신이 훼손한 것이 정확하게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연지는 쪼그려 앉아서 상자를 내려보다가 몸을 일으킨 후 선물 상자를 그대로 두고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3. 주제를 향한 문장
주제를 얘기하기 전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다. 그는 같이 일하던 선배였다. 운전면허가 없던 그는 당연히 자동차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 일이 끝나면 집까지 태워다 줬다. 그렇다고 그가 고맙다며 내 차에 특별히 기름을 넣어줬던 기억은 없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면서 그에게 벌초의 어려움을 얘기했다. 땅이 넓어서 하루에 못 끝내고 혼자서 3일 동안 한다고. 벌초가 끝나면 몸살이 날 정도라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제안을 했다. 금년에는 내가 도와줄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렇게 말한 게 사월이었고 벌초는 구월이었다. 오 개월간 나는 일이 끝나면 열심히 그를 집까지 태워다 줬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아침에 태우러 간 적도 있었다. 나의 이러한 수고는 모두 벌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약속한 구월이 되었다. 추석을 앞두고 그와 벌초 날짜를 잡고 그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저에요. 집 앞에 도착했으니 나오세요.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어제 술 마시고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왔어. 같이 못가겠다. 순간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과 함께 쌍욕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에게 욕을 내뱉을 순 없었다. 알겠다고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성질이 나는 거다. 거지 발싸게 같은 인간. 나 혼자 차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이 인간은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뢰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 힘들다. 이 소설이 그렇다. 연지의 호의가 계속되니 수영은 당연한 줄 안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처음에는 고맙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걸 잊는다. 시간의 흐름에 이쪽의 호의가 무시 되는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니 내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 인간이 떠올랐다.
자, 쓸데 없는 얘기가 길었다. 주제로 넘어가보자. P191 마지막에는 주제에 못을 박는 문장이 나온다.
“연지는 쪼그려 앉아서 상자를 내려보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선물 상자를 그대로 두고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건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4. 클라이맥스
P191의 선물이 종이 쇼핑백을 찢고 나와 접시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이다.
“카페 유리창을 통해 멀어지는 연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서둘러 일어난 것치고 발걸음이 느릿했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순간 연지가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상자가 떨어졌다. …… 연지는 떨어진 상자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환청처럼 수영의 귓가에 울린 듯 했다.”
5. 주제를 강화하는 소도구
■선물세트(고가의 브랜드 접시): 비싼 접시가 깨지는 것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제목 ‘회생’: 다시 이어지는 게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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