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세상 참 좁다.

고등학교 시절,

저녁을 먹은 뒤 밤마다 높은 곳에 올라갔다.

우리 집 뒤편의 가장 높은 계단에 앉아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했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달동네 꼭대기에서
나는 혼자 라디오를 들었다.

 

9시 뉴스가 끝나고 시그널 뮤직과 함께 비음이 가득 섞인 독특한 음색이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감은 고물 라디오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이때마다 나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내가 보낸 엽서가 오늘은 소개 될까?

1983년의 여름밤은 매일밤 설레였다.


당시에 음악을 들려주고

내 엽서를 소개 해주던 분이 초대손님으로 오셨다.
제가 고1 때 밤마다 선생님 방송을 들었어요.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에게 사춘기 소년처럼 흥분했다.
아, 그러세요?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점점 흥분으로 변해갔다.

 

그때의 무허가 우리집은 아파트로 탈바꿈했다.

버스에서 내려 계단과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끝없이 올라가야 했던,

달동네의 꼭대기에 있는 하얀집,

양철 대문을 지나면 마당의 수돗가,

밤마다 동생과 함께 갔던 재래식 화장실,

그리고 떠도는 구름처럼 살았던 아버지와 고물장사를 했던 어머니,

차가운 겨울밤에도 한방에서 온 식구가 잠을 잤던 그곳,

이제는 꿈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

그때의 풋내기가 이젠 오십 대 후반이 되었다.

 

계단에 앉아서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던 산울림의 청춘을 따라 불렀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입처럼.... 

가로등으로 불나방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걸 보며 조금 울었던 것 같다.

 

 

KBS 이종태 (전)아나운서와 사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