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시립도서관 4층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의 블랙커피로 혀끝은 방금 일어난 것처럼 텁텁했고, 온풍기에서 쏟아지는 건조한 바람으로인해 눈 주위는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했다. 한밭도서관 4층 92번 자리에서 오늘 나는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엠씨스퀘어 3번 프로그램이 세바퀴 째 돌았으니 아마 세 시간은 넘었을 듯 하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인지 내 귀는 고통으로 아우성 쳤으며 창밖에는 한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김승옥의 소설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김언수의 소설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김애란의 소설집이었나. 어쩌면 조해진의 소설집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거기 그 자리에서 삼년 내내 단편소설만 읽었으니 소설인 것 만큼은 확실하다. 그래도 그늘진 기억의 저편에서 선명하게 되살아 나는 것이 있다면 나도 그들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그러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지금껏 이렇게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과연 소설가의 자질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젠 달리는 말에서 내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 지나온 시간들이 진저리쳐지게 지리멸렬 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노력에 비해 손에 쥔 것이 없고 돌아오는 대가도 없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는 이 사각형의 열람실 책상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고 밖으로 나가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을 잔혹스럽게 짖이겨 버리고 싶다는 거센 충동이 일었다.
그때였다. 시립도서관 4층의 비좁은 창틈으로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햇살은 내 손등으로 올라왔다. 나는 손등을 타고 오르는 햇살을 멍하니 쳐다봤다. 한 조각의 햇살이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러는동안 내 마음은 부드럽게 이완되고 있었다. 조금 전의 모조리 때려우고 싶다는 충동이 그저 믹스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욕구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충동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은 마치 나를 이렇게 타이르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지금의 너의 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잖아. 순간 뜨거운 것이 올라와 나는 울컥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걸까? 나는 햇살을 계속 들여다 봤다. 손등을 타고 오르던 햇살은 이제 내 팔뚝을 거쳐 뺨까지 올라왔다. 햇살이 뺨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얻었다. 조금 더, 아니,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적어도 남는 것이라도 있겠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무거운 침묵이 자리한 시립도서관의 열람실에서 나를 위로 해준 한줌 햇살이. 나는 아마 그때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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