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품 분석

반려빚 / 김지연 / 작품분석 / 2024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방송인 김경훈 2024. 2. 3. 11:45

■반려빚 / 김지연 / 작품분석 / 2024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1. 전체적인 총평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말을 잘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똑같은 얘기라도 이 여자가 말을 시작하면 이상하게 긴장감이 생기고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가만히 듣다 보면 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특징이 있었는데 적당한 곳에서는 끊어 주고, 느슨해질 때는 잡아당겼다. 여자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흥분했다. 어쩜 그런 인간이 다 있니. 정말 못됐다. 흥미뿐만 아니라 여자는 감정 전달도 잘했다. 사실 그녀는 말을 잘한다는 것보다는 말을 풀어가는 솜씨가 탁월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의 그녀를 떠올렸다. 이 소설 역시 작가가 그 여자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작가는 작품에서 주인공의 현재 상황(1억 6천만 원의 빚이 생긴 이유)을 먼저 던져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면 독자는 주인공의 행동에 안타까워 한다. 돈을 빌린뒤 잠적한 애인이 갑자기 연락해서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장면에선 흥분하게 만든다. 와, 따귀를 한대 때리고 싶을 정도다.
게다가 이 소설의 또 다른 장점은 ‘동화’다. 여기서의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책이 아니라 이끌리다, 또는 서로 같아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마치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앉은 것처럼 독자도 화자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인상적인 것은 또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인칭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 작품은 3인칭임에도 불구하고 내면 묘사가 훌륭하다. 1인칭은 일기를 엿보는 것처럼 화자의 내면을 엿볼 수 있지만 3인칭은 피사체를 밖에서 보는 것처럼 객관적인데 이 작품은 3인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주인공 정현의 내면에 독자가 동화된다. 나는 이게 작가의 필력이고 실력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자꾸만 아쉽다. 왜 돈 얘기와 연애 얘기 뿐일까? 그리고 서일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김빠진 사이다처럼 모든 것이 밋밋해졌다. 나는 퀴어 소설을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2. 서사
 (1) 마트의 반려동물 코너를 지나며 선주는 정현에게 개나 고양이, 연어 등의 반려동물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정현은 서일과의 긴 연애(동거) 끝에 1억 6천만 원의 빚만 남은 것을 떠올린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무슨 반려동물이란 말인가. 정현은 빚진 것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아니 나는 반려동물 싫어. 그럼 너는 무슨 낙으로 사냐는 선주의 말에 정현은 난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2) 그날 밤 정현은 반려빚과 산책하는 꿈을 꿨다. 목줄은 쥔 쪽은 반려빚이다. 목이 말라 카페에 들르겠다는 정현의 말에 반려빚은 목줄을 잡아당긴다. 집에 커피믹스 있으니 그냥 가란다. 원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현은 꿈을 깬 뒤에도 한없이 작아졌다.
 (3) 정현은 서일에게 돈을 빌려주며 차용증도 쓰지 않았다고 선주에게 털어놨다. 당시 정현은 서일을 백 퍼센트 신뢰했다. 선주가 서일을 욕해도 정현은 서일의 편을 들고 싶었다. 당시 정현은 전세 사기의 피해자인 서일을 도와주려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을 모두 보내주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서일은 빌린 돈에 대해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이후 서일은 연락이 뜸해졌고 정현의 연락을 피했다. 전화번호를 바꾸었고 결혼도 했다. 선주와 얘길 나누며 정현은 자신이 망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힘들면 혼자 울지 말고 자신에게 말하라는 선주의 말을 듣고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4) 서일에게 연락이 왔다. 부탁하나만 들어달라며 만나자는 것이다. 내키지 않았으나 정현은 덜컥 약속하고 말았다. 돈을 갚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카페에서 서일을 만난 정현은 내키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다. 서일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서일의 부탁이란 정현의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혼했으며 위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하더니 돈을 갚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정현은 서일에게 말했다. 나는 너 못 믿는다.
 (5) (과거) 어느 달엔가 나가야 할 돈이 13만 원이 부족한 적이 있었다. 연체되면 신용점수가 낮아지고 혹시나 신용 불량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현은 고민했다. 하지만 돈을 빌리지는 않았다. 13만 원이 없는 자신을 가엾게 보는 시선을 견디는 게 수치스러웠다. 할 수 없이 서일이 예전에 선물해준 애플워치를 중고장터에서 20만 원에 팔았다.
 (6) 서일을 카페에서 만난 정현은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망한 얘기를 꺼낸 뒤 속이 후련해진 정현은 맘 편히 털어놓을 사람이 서일 뿐이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서일에 말을 들으며 정현은 돌고 돌아 마침내 귀의해야 할 종교를 만난 것처럼 서일을 믿고 싶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선주가 서일의 머리채를 잡지만 않았다면 정현은 서일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을지도 몰랐다.
 (7) 서일이 보낸 돈으로 정현의 계좌에는 제법 큰 돈이 생겼다. 그 돈으로 정현은 대출을 해지했다. 빚을 다 갚은 그 날의 날짜와 숫자 등을 기억해 로또복권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딱 하나의 숫자가 비었고 그걸 부탁하기 위해 정현은 서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 받은 사람은 서일이 아니었다. 전화번호가 바뀐 것이다. 생전 처음 통화하는 초등학생에게 정현은 숫자 하나만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당첨되면 반을 주실 거냐는 물음에 정현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 말을 어떻게 믿냐며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 주냐고 말했다. 그러더니 난생처음 본 초등학생에게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혼자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현은 로또복권을 샀지만 맞춰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복권을 사고 맞춰보지 않았다. 또 로또를 사고…그렇게 1년 동안 돈을 마구 쓴 정현은 인생이 견딜 수 없어질 때마다 그간 샀던 로또를 꺼내 맞춰보았다. 죽을 때까지 로또를 사도 당첨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현은 내 몫으로 남은 행운을 이런 곳에 쏟아붓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자고 생각한다.
꿈속에서 반려빚이 나와서 정현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우린 진작 헤어졌다는 정현의 말에 반려빚은 짐을 싼 뒤 정현을 떠났다. 마침내 ‘0’이 된 정현은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3. 주제를 향한 문장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모습과 빚에 대한 두려움이 드러난 작품이구나.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좀 다른 느낌이 든다. 물론 서일이 여자임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이번에는 좀 더 복합적인 주제가 보였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를 믿고 있는가? 상대에게 우린 어떤 마음으로 행동해야 할까?
 이제 주제를 찾아보자. 주제를 암시하는 문장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상적인 문장은 P79의 아래에 나왔다.
“정현은 서일을 믿고 싶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하지만 문제는 정현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그간 자신이 선택했던 것들이 자신을 배반한 역사가 너무 길고 깊었기 때문에 거기서 조금이라도 배운 게 있다면 정현은 더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다.”
 이번에는 P84를 보자.
 “내가 좋은 사람이냐?”는 정현의 물음에 서일이 대답한다. “너는 나를 못 믿는 댔지만, 난 너를 믿어.”
그리고 주제에 쐐기를 박듯이 그 뒤에는 확실한 게 나왔다. P87 아래쪽이다.
 “로또 당첨되면 반을 줄 거냐”는 초등학생의 물음에 정현은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이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 줘요?”
 자, 이제 정리해보자. 소설 속에서 서일은 착한 정현에게 실망을 줬지만 마지막에는 약속을 지켰다. 정현은 그게 미안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로또복권을 사고도 당첨 번호를 맞춰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그게 주제다.
 
4. 주제를 강화하는 소도구
■로또복권: 부와 행운이지만 여기선 믿음을 상징
■초등학생과의 통화: 믿지 못하는 것, 불신을 의미
■반려빚: 어차피 안고 살아야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
 
5. 서일이 여자임을 나타내는 것들
■서일의 직업: 네일숍
■주인공 정현이 서일을 욕하는 장면(혼잣말): “미친년이…낯짝도 두꺼워 가지고…”(P78)
■이혼 위자료: “서일의 결혼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그 많은 돈을 받았다니
남편의 귀책 사유가 정말 큰 모양이라고 정현은 생각했다.” (P84)
 
6. 아쉬운 점
■마지막 단원(나라면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다): 긴장도를 높여가던 서사가 뒤에서 밟힌 두부처럼 볼품 사나울 정도로 뭉그러졌다. 물론 이것도 작가의 의도였겠으나 나라면 선주에게 머리채를 잡힌 서일의 모습과 그 뒷얘기를 좀 더 흥미 있게 끌고 나갔을 것이다.
■설정이 억지스럽다: 소설은 현실적이어야 공감이 된다. 반려빚이 사람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 끌고다닌다는 설정은 짜증이 났다. 또 이런 것도 있다. 13만 원이 없어서 애플워치를 판다는 장면이다. 물론 13만 원이 누군가에게는 큰돈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독자가 공감할까? 또 28만 원으로 마구 써보자고 다짐하는 장면에선 “이게 뭐야” 김이 완전히 빠졌다.
■아쉬운 문장: P81는 거슬렸다. “정현이 한 나쁜 짓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가기 싫어서 일주일 정도 무단결석을 한 것뿐이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담배꽁초 하나 버리지 않았다.”
여지껏 주인공 정현의 캐릭터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왔는데 뜬금없이 담배꽁초라니 황당하다. 사람의 인품도 그렇지만 소설도 한 줄의 말과 문장으로 품격이 달라진다. 차라리 ‘담배꽁초’를 ‘껌 종이’ 정도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