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된다.
맹자의 '군자삼락(三樂)' 중에 세번째가 ‘인재를 가르치는 기쁨’이라고 했다. 최근에 나는 이 말을 절실히 실감했다. 연봄에 씨앗을 뿌렸다고 생각했는데 가을이 되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로인해 연말이 다가오며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워졌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2019년에도 나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했다. 게다가 더욱 서글픈 것은 앞으로도 고달픈 내 인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나는 끝도 없는 깊은 곳, 어딘지 알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떨어지며 튀어나온 부분에 내 머리와 어깨가 부딪쳤지만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덧 기말고사가 끝나 차분히 앉아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들여다봤다. 항상 그래왔듯 이번학기도 시험문제는 두 개였다. 많은 문제를 제출해 학기들이 괴로워하기 보다 전공과목에 좀 더 충실 하라는 의도였다. 학생들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이곳저곳에서 발견 되었다. 우리의 현재를 들어야 보고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읽으며 나는 슬몃 미소를 보였을 것이다. 물론 알아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휘갈겨 쓴 악필을 만나면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앞 뒤로 빽빽하게 적은 수십장의 답안지를 읽어 나가는 것이 때론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한 시간 넘게 공들여 쓴 것에 비하면 읽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만세를 부르듯 기지개를 한번 켜고 다시 답안지를 들여다 봤다. 그때 내 눈에 띄는 답안지가 나왔다. 나는 수강생이 공들여 적은 글씨를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그녀는 이제 곧 졸업을 앞둔 4학년이었는데 몇 개의 문장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대개의 경우 학생들의 답안지는 비슷했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뭔가 콕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녀는 한없이 울적하고 무거운 늪에 빠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착한 강의 에세이 공모전에 교수님에 대한 수업을 제출했는데, 제 글이 대상으로 뽑혔어요.’
아아아, 갑자기 마이크 테스트처럼 감탄사가 터졌다. 그녀의 기쁨이 내게도 전달 되는 것 같았다. 내 수업을 대상으로 쓴 글이 큰 상을 받았으니 당연히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채점을 멈추고 학기중의 그녀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봤다. 그녀는 강의실에 남보다 일찍 왔었고, 필기가 없는 수업이었음에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었다. 게다가 수업이 끝나면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반듯하게 밀어 넣고 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나는 그녀의 답안지를 통해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녀보다 두 배나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나는 부정적이었고 감정적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 서운했던 점도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통제 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고 그로인해 나는 자학했다. 삶은 왜 이다지 폭력적인가. 나는 수 천 킬로나 되는 만리장성을 한낱 사람에게 맡긴 진시황의 폭력처럼 타인을 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학과 염세가 나를 폭력적으로 만든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괴로움의 연속일까. 아니면 무조건 버티면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은 고통의 총량으로 볼 때 과거보다는 미래가 훨씬 덜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남은 내 인생은 실성한 사람처럼 마음껏 웃고 다녀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