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기

홍도 흑산도 유람기 2

방송인 김경훈 2019. 9. 21. 23:13


 



1730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천사 송어 횟집역시나 천사란 단어가 들어간 식당이었다. 간판을 보니 노란색 바탕에 흰색과 빨강색의 글씨로 쓰여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홍어 캐릭터였다. 군에서 제작한 CI 같았다. 공공성이 있은 캐릭터였으니 저작권 분쟁도 없을 것이다. 저녁에는 우럭과 광어회도 나왔다. 육지에서 먹는 맛과 달랐다. 부드러우면서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홍어를 안 먹어 볼 수 없잖아? 내가 살게.” (장연)이 말했다. 녀석은 돈을 멋있게 쓴다. 가진 자 만의 여유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다. 친구를 위해 홍어 한 접시를 사는 것은 정승처럼 쓰는 돈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나온 홍어회를 보고 실망했다. 너무 적었다. 한 사람이 두 점씩 돌아갈 정도의 양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흑산도 홍어는 별로였다.






1930

  숙소로 이동했다. 버스기사는 우리일행을 천사 펜션앞에 세워주었다. 버스기사의 말에 의하면 천사 펜션은 서정표씨가 주인이란다. 돈을 벌어 이층집을 샀다는 것이다. 가정집을 개조한 천사 펜션은 흔히 보는 이층 슬라브 집이었다. 방 두 개, 화장실 두 개, 거실과 주방 하나씩이 우리 몫이었다. 최악은 아니었다. 방이 넓었으니까. 하나는 여자들이 쓰고 다른 하나는 남자들이 자기로 했다. 밤이 되자 간단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맥주에는 뭐니 뭐니 해도 치킨 아닌가. 치킨 배달이 가능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서정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달이 가능하단다. 대신 두 마리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십분 뒤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배달 문화는 흑산도에도 있었다. 맛은 육지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어차피 한 군데 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가져 온 맥주를 마시며 만원짜리 노래방 마이크로 노래를 불렀다. 내가 한 곡, (봉섭)도 한곡, 그걸로 끝이었다. 다들 못한다고 빼니까 재미는 없었다.






둘째 날, 2019818(일요일)

  간밤에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눕자마다 잠이 들은 것 같다. 나는 새벽에 눈을 떴다. 두 명의 남자가 양쪽에서 코를 골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시계를 보니 여섯시였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황(장연)이 일어났다. 더 자라고 말하니 낚시를 가겠단다. (장연)은 여(희구)와 지(봉섭)을 깨웠고 그들은 마당으로 나가 갈색가방에서 낚싯대를 꺼냈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방에서 티브이를 봤다. 잠시 후 마당이 조용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나는 방파제 쪽으로 걸어갔다. 삼십 미터쯤 앞에 양산을 쓴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양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반바지와 양산이 어촌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로 나가니 세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 조금 전에 보았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황(장연)의 아내였다. 양산을 눌러 썼으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방파제 옆에 붙은 따개비를 따고 있었다. 나는 방파제 끝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장연)은 자신이 잡은 우럭을 자랑했다. 나는 낚시가방을 뒤졌다. 황의 말은 진짜였다. 비닐봉지에 우럭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크기가 내 손가락만 했다.


 




805

  버스기사가 펜션으로 우리를 태우러 왔다. 우리는 방을 정리하고 버스에 탔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펜션을 바라보며 나는 잘 있으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중얼 거렸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천사 송어 횟집으로 들어가자 구수한 냄새가 났다. 메뉴는 전복죽이었다. 큰 그릇에 전복죽이 가득 담겨 나왔다. 많은 양이었지만 먹다보니 바닥이 드러났다.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흉볼 만큼도 아니었다. 버스 기사는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를 태우고 여객선 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우리 옆에 앉았다. 내가 왜 가지 않느냐고 묻자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기사가 말한 할 일이란 여객선이 도착하면 손님을 태워야 하는 것이었다. 배를 기다리며 우리는 터미널 옆에 있는 공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이가 들며 새삼 느끼지만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오늘도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 주름이 보기 싫단다.




 




1120

  두 대의 배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먼저 온 배는 파라다이스였다. 우리는 잠깐 당황했다. 우리 배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유토피아였기 때문이다. 터미널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금 배는 파라다이스입니다. 유토피아 손님들은 잠시만 대기하시길 바랍니다.” 두 대의 배가 비슷한 시간에 들어와 생긴 일이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누가 배 이름을 지었을까?

  우리는 버스 기사와 작별 한 후 배에 올라탔다. 다행히 뒷좌석이었다. 파도는 높지 않았으며 바람은 잠잠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1320

  목포여객선 터미널에는 한 시 넘어 도착했다. 멀미는 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육지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팔월의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고 아스팔트는 프라이팬처럼 달구어져 있었다. 무거운 짐은 홀가분해졌고 추억은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었다.


 

 

1340

  뭐든 먹어야 했다. 인터넷으로 목포 맛 집을 검색했다. 대부분 자작 글의 냄새가 났다. 이렇게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장연)의 아내가(아닐 수도 있다. 졸다가 들어서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해 빔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해 빔? ‘해물 비빔밥의 줄임말이었다. 목포가 초행인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화광장 앞에 위치한 해 빔의 첫 인상은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만 이천 원짜리 낙지 비빔밥과 꽃게 비빔밥을 시켰다. 황은 그 와중에도 물 회를 주문했다. 소주를 먹기 위해서다. 벽에 붙은 메뉴판에 해초의 효능이 적혀 있었다. ‘해초는 식이 섬유가 풍부해 노폐물을 배출하고, 면역력을 높이고, 항암 효과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걸 누가 몰라? 맛이 문제지. 밑반찬이 나오자 늘 그랬던 것처럼 몇 사람이 젓가락을 들었다. 김치, 애 호박 나물, 오이무침, 어묵볶음. 젓가락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걸 떡 거리지 마라.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빔밥은 호불호가 갈렸다. 낙지비빔밥은 나름 먹을 만 했지만 꽃게비빔밥은 비린내 때문에 맛이 없었다.






1440

  목포가 초행인 까닭에 관광지 한 곳쯤은 가봐야 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유달산? 더운데 거긴 뭐 하러 가? 김대중 평화광장? 거긴 아까 해초 비빔밥을 먹었던 곳이잖아. 갓 바위? 여기가 좋겠다.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십 분쯤 이동하자 갓 바위라는 안내판이 나왔다. 주차를 끝낸 우리는 호수 위의 데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달구었다. 손바닥으로 부채를 만들어 열심히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오 분쯤 걸어가자 갓 바위가 위용을 드러냈다. 바위 꼭대기에 그리스 전사의 투구처럼 생긴 특별한 바위였다. 왜 갓 바위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정면에 표지판이 보였다.

천연기념물 제500호인 목포 갓 바위는 과거 화산재가 쌓여서 생성된 응회암과 응회질 퇴적암류들이 오랜 시간동안 암석의 자연적인 풍화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갓 바위의 형태는 계속하여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해 가는 기나긴 지질 및 지형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

  우리는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오래 서있기 힘든 날씨였으니까. 이상하게 갓 바위를 보고 탄성을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이틀 동안 더 멋진 경치를 봐서 그렇지 않았을까.






1520

  우리는 목포를 출발했다. 대전에서 올 때와 같은 좌석 배치였다. 한 번 해봤는데 두 번 못하겠어. 나는 유달산을 바라보며, 더위에 늘어진 가로수에게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