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껴준 당신께
나를 아껴준 당신께 보내는 편지.
정든 대전을 떠나며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떠나기 전에 당신께 몇 마디라도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매번 저를 ‘경팔이’라고 불렀지요.
경팔이, 저는 그 이름이 좋았습니다.
추측컨대 당신 이름과 장난스런 단어 '팔'자를 넣어 그렇게 불렀을 겁니다.
당신은 참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차에 오르며 “경팔이, 안녕!” 이라고 말했지요.
저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친근했는지 모릅니다.
장거리 운행을 마치고 나면 수고 했다며 본 네트를 두드려 주었고,
눈이 오는 날에는 노상에 세워져 있던 저를 지하주차장까지 일부러 내려 주었습니다.
차가운 대기가 세상을 뒤덮던 그때, 당신의 슬리퍼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기뻤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이 기억납니다.
2006년 따스한 봄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날이었습니다.
월평동 중고차 매장을 찾아온 당신은 저를 그윽한 눈빛으로 보며 중얼 거렸습니다.
“멋진 차다!”
당신이 제게 던진 첫 마디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당신 것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핏빛 적토마가
의리의 관운장을 만난 기분을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동물이든 저같은 사물이든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쁜가 봅니다.
시험운전 때, 시트에 앉자마자 당신은 들릴 듯 말 듯 중얼 거렸습니다.
“이 차를 사고 싶다.”
아, 저의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을까요.
그것에 대해 아직도 궁금하지만 이제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당신과 저는 헤어져야 하니까요.
당신이 언젠가 그랬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는 기아의 '아벨라'를 타고 다녔다고.
그 차는 좋은 차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의 얘기로는 에어컨을 켜면 그 차는 늙은 퇴마처럼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힘겨워 했다고 말했습니다.
1천 6백만 원이었던가요?
금액이 부족했기에 당신은 저를 사기 위해 이리저리 돈을 끌어 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인도 된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저를 볼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당신의 미소에 저는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봄에는 가족들을 태우고 벚꽃이 핀 진해로 달려갔고,
여름에는 거제도로, 가을에는 통영으로 내려 갔습니다.
단풍철에는 내장산에도 갔을 겁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아니 당신이 행복하다면,
저는 어디든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해준 고마운 당신,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백하건데 당신이 고통스러워 할 때마다, 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2014년이었던가요.
당신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그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7개월이란 시간동안 그 사람은 제 뒷자리에 타고 주인행세를 했습니다.
이리저리 치이며 당신은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의 당선이 당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제 착각이었습니다.
그 사람, 지금도 기억납니다.
가면을 쓴 그 사람은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 차안에서 노력했습니다.
그 사람은 뒷좌석에 앉아 매일 당신을 칭찬했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김 실장의 고마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당신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당신에게 매일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김 실장 최고! 라고 외치던 그 사람은 어이없게도
당선 되던 순간부터 연락을 끊었습니다.
당신, 울었던가요?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소리를 질렀던가요?
매일 매일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던가요?
꽝, 꽝, 꽝. 주먹으로 핸들을 치던 그 많은 시간들.
그리고 이어지던 혼자만의 거친 소리들.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많이 아팠습니다.
나를 사랑해주었던 당신,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배신의 아픔을 뒤로 하고 다시 기운을 내고 있는 당신.
늦은 나이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도서관을 찾는 당신이 제 눈에는 참 멋져 보입니다.
“2004년 투싼이고요. 25만 킬로미터 탔습니다. 가격은 80만원만 적어주세요.”
교차로 생활정보지의 상담사에게 당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순간, 헤어질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당신은 차창 밖의 허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혼자 말했습니다.
“경팔아, 그동안 고마웠다.”
그 짧은 말에서 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다음날, 저를 사겠다고 전화가 여러사람에게 걸려왔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당신은 일부러 청주에 사는 사람을 선택했을 겁니다.
거리에서 저를 보면 괜시리 마음이 아플까봐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 역시, 당신을 거리에서 본다면 마음이 아련해질테니까요.
“새 주인을 만나 행복하길 바란다.”
차량 등록사업소에서 새 주인을 만났을 때,
당신은 핸들을 잡고 중얼 거렸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그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고마운 당신,
저는 이제 정든 대전을 떠납니다.
남겨진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제게 당신은 행복이었습니다.
다음에 만나는 애마 역시 당신은 저처럼 사랑해 줄 거라 믿습니다.
이제,
당신의 따뜻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괜시리 슬퍼집니다.
안녕,
나의 멋진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