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마음이 심란했다. 정확히는 일주일 전부터 초점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그렇다. 2016년 11월에 아들이 수능 시험을 봤다. 아들이 말했다. “떨리지 않아요. 그냥 모의고사를 다른 학교에서 본다고 생각할거예요.” 녀석 제법인 걸. 의젓하게 말할 줄도 알고. 아무튼 긴장이 되지 않는다니 안심이다. 한데 자꾸만 내가 떨리는 이유는 뭘까?
2016년 11월 17일. D-데이다. 평소에는 베게에 머리만 대면 깊은 잠을 잤던 내가 간밤엔 몇 번을 깼는지 모른다. 아침 6시에 아들을 깨웠다. 얼굴을 보니 녀석도 어젯밤 잠을 자지 못한 것 같다. 하긴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아내가 쇠고기 무국을 끓여 식탁에 올려놨다. 웬 거냐고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수험생들에게 ‘쇠고기 무’국을 추천했단다. 그리고는 며칠 전 마트에서 3만원을 주고 구입한 보온도시락에 점심을 쌌다. 반찬은 어묵볶음, 총각김치, 김자반 이었다.
7시10분. 출발하기 위해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들과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교복을 안 입겠단다. 학생이 교복을 안 입겠다니. 나는 아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교복 입고 가자. 3년 동안 입은 거잖아. 아들이 못마땅하게 대답했다. 교복은 불편해요.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고 싶어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내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이런 일로 신경을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잖아요. 아내의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7시 15분. 집을 나섰다. 고사장까지는 넉넉잡아 15분 거리였지만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거리는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한번만 받아도 충분히 갈수 있을 만큼. 이게 다 수험생들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7시 30분. 시험을 보는 충남기계공고에 도착했다. 교문 앞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전광역시교육청 제27지구 제1시험장.’ 사람들이 북적였고 오고가는 차들로 도로가 혼잡했다. 두 명의 경찰과 서너 명의 모범운전자들이 제복을 입고 나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차를 여기 세우면 안돼요. 빨리 빼주세요. 고사장 입구에는 후배들이 ‘선배님, 수능 대박 나세요.’라는 현수막을 들고 수험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초콜릿과 사탕을 한 움큼씩 쥐어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후배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수험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고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교문 앞에 내차가 멈추자 아들이 내렸다. 다녀올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나도 따라 내리고 싶었다. 아들에게 네 실력을 멋지게 발휘하는 거야, 라는 말을 하며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다. 그게 멋진 아버지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차를 세울 곳도 없었지만 극성스런 행동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고 있던 1998년 6월에 태어났다. 녀석이 태어났을 때 아내와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내 유전자를 가진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에 우린 감격했다. 우리 부부는 다짐했다. 이 아이가 해주고 싶은 것은 모두 해주되 극성스럽게는 키우지 말자고. 치마 바람을 휘날리지 말자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라도 빨리 차를 빼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사장 앞을 빠져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가 울컥 하며 올라왔다. 아이를 생판 낯선 곳에 내려주고 오는 느낌이었다.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문 앞까지 따라가 웃는 얼굴로 ‘우리 아들 파이팅!’이라고 말해 줄걸.
8시 20분. 일하는 곳에 도착해 시계를 봤다. 이제 20분 후면 시험이 시작되리라.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인 만큼 떨지 않고 잘 봤으면 좋겠다.
오후 4시 30분. 아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고사장 앞으로 갔다. 시험이 4시 30분에 끝난다고 했으니 10분 뒤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고사장 앞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림잡아도 200여명쯤 되어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더 불어났다. 300명, 400명.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도로에 차를 세웠으니 학교 앞은 주차장이 되었다. 하지만 오전과 달리 교통 정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한쪽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수험생들이 나올 고사장 안쪽. 문득 서있는 자세가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 화단 옆에 쭈그려 앉은 사람,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그중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 사람은 초조하면 팔짱을 끼는 가보다. 그러다 내가 패딩 점퍼를 입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는 절대 패딩을 입지 않은 내가 왜 이걸 입고 왔을까, 후회스러웠다. 아들의 친구들도 만날 텐데.
4시 50분. 시험을 끝낸 4명의 수험생이 교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리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수고했다는 박수, 고생했다는 박수, 이젠 편히 쉬어도 된다는 박수였다. 얼결에 박수를 받은 수험생들이 머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고사장 3층 창문이 열리며 시험감독이 소리쳤다.
“감독관 허락 없이 나가면 안돼요. 결시 처리 할 겁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그 소리에 수험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고사장 안으로 뛰어갔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황망한 순간, 누군가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다시 들어갔잖아요.
5시 20분.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꺼번에. 물밀 듯이. 순간 고사장 앞에 서있던 사람들의 대오가 흐트러졌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수험생의 이름이 불려 지며 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손을 잡았고, 포옹을 했고, 뺨을 어루만졌다. 다짜고짜 “시험 잘 봤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맙소사. 고생한 아이에게 첫마디가 시험 잘 봤냐고 물어보다니?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환하게 웃어줄 거다. 주인공 엔디가 자신을 찾아온 레드를 보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웃어주던 그 장면. 가슴이 뭉클했던 그 장면처럼 나도 활짝 웃으며 아들을 안아줄 거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등을 두드려주는 정도였다. 왜냐고? 나는 극성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녁 6시. 매운 것을 먹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근처 중국집으로 향했다. 아들과 나는 짬뽕. 딸아이는 자장면을 시켰다(아내는 근무 중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이젠 결과를 받아들이자. 겸허하게.
아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루며 내가 느낀 것이 있다. 수능시험은 나라가 만들어 놓은 제도의 울타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수능시험을 계기로 부모에게서 서서히 독립하게 될 것이라는 것. 이젠 아들의 앞에는 군 입대, 졸업, 취업, 결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니까.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 나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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