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4형제다.
그래서 작은체구의 내 어머니는 아들만 넷을 키웠다.
아들만 키워본 집은 안다.
아들만 있으면 집안 분위기가 아주 건조하다는 것을.....
젊은날
내 아버지는 잦은 음주와 함께 폭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묵묵히 챙기며 우리 4형제를 다독이며 살아 오셨다.
아버지는 생활능력이 없으셨고
그런 남편을 만난 내 어머니는 자식들 학비를 벌기 위해
여자의 몸인데도 리어카를 끌며
고물장수와 행상으로 죽도록 일을 했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성남동에 있는 무허가 달동네에서 30여년을 살았다.
내가 살았던 그 집은 대문도 없었으며 화장실 조차 변변치 않았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 집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 화장실은 바닥에 앉기 두려웠고
되도록 밖에서 용변을 해결하려했다.
그러나 정말 참을 수 없을때는 멀리 있는 '공중변소'에 간적도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비워주는 정화조 차가 다녀간날은
하루종일 그 냄새가 마치 우리가족을 잡으려듯이 온 집안을 떠돌아 다녔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리고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자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연탄을 갈아주셨고,
추운겨울에는 꽁꽁 언 수도가에서 손을 호호~불며
그 거친손으로 아들들이 입을 교복을 빨아 주셨다.
내 어머니는 생활 능력이 강하셨다.
젊은날에는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셨고
40대에는 남자들도 힘들어하던 리어카를 끌며 오랫동안 고물장사도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아니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어머니가 부끄러웠다는 말이 정확할게다.
청소년 시절~
거리에서 고물장사 리어카를 끌고가는 어머니를 보면
챙피함에 누가볼세라 멀리 피해갔던 적도 많았다.
그 시절에 내어머니는 하루종일 수집한 고물을 고물상에 판후에,
저녁무렵 땀으로 범벅된 몸을 이끌고
혼자 빈 리어카를 끌고 어두워진 달동네를 올라 오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항상 눈물을 훔쳤다.
세월이 흐르고....
군대를 다녀오고 온 나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부터 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내 아내가 큰 아이를 낳은후에는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위해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14년을 피웠던 담배를 끊었고
2008년부터는
"네 아버지 봐라~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50대초반에 뇌졸증으로 20년을 고생했잖니?
그러니 이젠 술을 끊으면 어떻겠니?"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지금은 가양동에서 쓸쓸하게 홀로 지내시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젊은날의 행상으로 인해
지금은 목과 등이 휘었다.
굽은 등을 펼수가 없다.
그래서 자세가 항상 구부정하다.
지금도 대전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소일을 하는 내 어머니는
자식들의 거듭된 성화에도 당신께서는 "쉬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그런 어머니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은 항상 먹먹해진다.
그리고....
자꾸 눈물이 난다.
어..머..니..